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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2008년 08월 17일 2026년 09월 13일

917번 버스는 방송통신대학교를 막 지나는 참이었어. 사람들이 하나둘씩 하차하기 위해 모이고 곧바로 나도 일어섰지.


'약속 시간은 7시 15분인데, 벌써 19분이라니!'


비온 뒤라서 날씨도 추운데 왜 자주 오던 차가 오늘따라 안나타나는지 20분이나 기다려서 겨우 차를 탔지. '뭐야! 웬지 불길한 예감까지.' 공연을 보기에는 늦지 않을 것 같았지만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니 조금 걱정이 됐지. '명함을 가지고 올껄.' 만약을 위해서 그의 명함을 챙겨서 집으로 가지고 갔었는데, 그만 깜빡해버렸어. 게다가 이제 다 왔는데 교통 체증까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에서 그의 전화 번호를 찾아봤지. 난 번호가 없을 줄 았았어. 그런데 '□'에는 그의 이름이 있더군. 순간 기뻤어. '조금은 덜 미안할 수 있겠구나.'


"안녕하세요... ○입니다. 어디 계세요?"


그가 공연장에 이미 도착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물었지. 그런데 너무 조용했어. '응! 전화가 끊겼나?' 그리고 그가 말했지.


"아... 네, ○씨, 죄송합니다. 제가 사무실 이사 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다음에 제가 밥이라도 사드릴께요.."

잠시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생각했어. 그리고는 그냥 웃었지.


"아... 네.. 알겠습니다. 네.."


전화를 끓고 버스에서 내리면서 잠시 멍한 상태였어. 맨처음 든 생각은 나와의 약속을 그가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그 다음에는 시계를 봤지. '이미 7시 24분이니까 티켓을 환불받을 수도 없을꺼야.'

 

2002년 2월 16일, 일요일인데도 대학로는 너무 밝고 사람도 많더군. 티켓 박스를 지나고 샘터 파랑새 극장을 지나고 스타벅스를 지나고, 무수히 많은 음식점들과 사람들과 지하철을 지나서 나는 공연장으로 걸어갔지. 언덕배기를 오르면서 포스터가 보이고 사람들은 벌써 입장했는지 조용하기만 했어. '사람이라도 많으면 팔 수나 있을텐데 팔지도 못하겠네.. 빌어먹을 자동문은 왜 내 앞에서 안움직이는거야!'

"저, 예약했는데요. 환불받을 수 있을까요?"


"손님, 지금 환불 안되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요."


"손님, 어제라도 취소하셨으면 환불해드릴 수 있을텐데요."


"저도 그러면 좋았겠지만 방금 전화를 받아서요."


뮤지컬 틱틱붐은 벌써 5번째 보는 거였지. 작년 12월에는 강남에서 종로에서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신촌 산울림 소극장에서, 바로 지난 주에는 이 곳에서. 하하하. 게다가 다음주 목요일에는 회사 직원 8명과 함께 또. 그래서 난 일말의 예외라도 있기를 간절히 바랬지.


"제가 벌써 5번씩이나 이 뮤지컬을 봤거든요. 다음 주에는 또 직원 8명과 함께 보구요. 그래서 또 보기가 뭐해서. 반액이라도 안될까요?"


"손님, 어제께라도 연락을 주셨으면 환불해드렸을텐데, 지금 공연 시각 얼마 안남았고..."


창구안에 여러명의 직원들이 모여드는 게 보였어. 그리고 그 직원은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하더군.

 

"손님한테 환불해드리면 저희가 물어야 되거든요."

제길, 차마 그럴 수는 없잖아. 결국 내가 잘못한 건데.. 그런데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왔지. 그에게도 화가 났고, 나에게도 화가 났고, 인정머리 없어 보이는 창구 직원에게도 화가 났고 바보같고 멍청하고 한심하고 한심해서. 나는 낚아채듯이 티켓과 팜플렛을 받아들었지. 그리고는 뒤돌아섰어. '○야, 니 주제에 무슨...' 너무 억울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언덕길을 올라오는 연인을 붙잡았어.


"저기요. 지금 시간 있으세요?"


"네? 시간 없는데요."

그들이 웃더군. 웬 미친 여자가 길에서 울면서 시간 있느냐고 하니까. 순간 그들 눈에 내가 도에 관심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처럼 보였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단독직입적으로 말을 꺼냈어.

 

"이거요. 공연 티켓인데요. 지금 시작하거든요. 시간 있으시면 보세요. 바로 여기서 해요."

 

그제서야 시간없다던 아가씨가 당황해서는 "울지 마세요."라고 말하더군. 곧바로 난 티켓 봉투를 그들의 손에 쥐어쥐고 돌아섰지. 다시 팜플렛도 함께. "이것도요." 하하, 그 연인들 정말 횡재한거야.

그를 처음 만난 건 어느 모임에서였지. 그는 초청 강사로 모임에 참석했었는데, 난 그 날도 늦게 도착했어. 문을 열고 자리에 앉으면서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치면서 난 그가 마음에 들었어. 하지만 그 날은 같이 술 한 잔 하러 할 시간도 없었지. 다시 사무실로 가야 했거든. 그리고 그 해, 송년회 모임에 갔던 건 사실 순전히 그 때문이었지.


난 그와 같은 테이블에, 마주보기를 원했는데, 우리는 한 사람 건너 나란히 앉아 있었어. 정말 고백하고 싶었어. 그를 바라보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지. 이제 2000년이 되는데. 난 한 번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같은 건 못해봤는데. 이대로 이 해를 보내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앉아 있던 어떤 여자분 때문에 결국 기회를 놓쳐버렸어. 이듬해에는 다른 모임을 통해 계속 얼굴을 볼 수는 있었지만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지. 그리고 모든 것이 흐지부지되고, 다시 한 해가 지나가고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밤샘 근무중이었지.


"오늘도 늦게까지 일하시나봐요?"

 

그가 채팅을 청해왔어.

 

"네, 전 야행성 체질인가봐요."

 

"네, 저도 그래요. 그래도 같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으니 좋네요. 한 해 동안 고마웠습니다."

 

"뭘요."


아마도 밤샘 근무를 자주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을 껄. 새벽 한 시, 두 시쯤 되면 어디에서 전화가 오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참, 오늘 발렌타인 데이인데, 제가 초콜렛 보내드릴께요. 행운의 사이버 초콜렛!'#######'"

 

그리고는 일상적인 대화들, 무료한 나날들에 대한 푸념. 오늘따라 그가 우울하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시간되시면 영화나 공연도 보러 다니고 그러세요. 전 주말이면 극장에서 아예 살거든요."


"네.. 전 영화 본지도 오래됐는데... 사람들하고 함께 있는 게 더 재밌잖아요."


"네, 그것도 재밌지만 어쩔 땐 그 사람들 때문에 힘들고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님께서 원하시면 제가 가이드도 해드릴 수 있어요. 참, 요즘 틱틱붐이라는 뮤지컬이 있는데, 제가 님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틀림없이 좋아하실 거에요."


"그래요? 그럼 언제 함께 보러 가죠."


"네.."


"그런데 보셨어요? 틱틱붐?"


"아니요."


"그럼, 언제가 좋을까요?"


"바로 약속 잡으시게요?"


"○님이 고민하실까봐.^^"


"음... 그럼, 이번 주 일요일 어떠세요? 7시 반인데."


"괜찮습니다."


"그럼, 티켓 예매는 제가 싸게 할 수 있으니까 제가 하구요. 맛난 거하고 이벤트는 님께서 준비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동숭아트센타에서 7시 15분에 뵈요."

맞은 편에는 바로크 레코드점이 보이는데, 나는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지. 그리고는 주머니속의 휴대폰을 꺼내 벨소리를 무음으로 설정했어. 그가 다시 전화를 해오면 난 내안의 모든 얘기를 그에게 털어놓아버릴 것만 같았어. 나도 안사는 R석 티겟이었는데. 요즘 가뜩이나 어려운데도 무리한 거였는데. 게다가 새로운 캐스팅으로는 다음주에 어차피 볼꺼였는데.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당신이 보면 좋아할 것 같아서. 오늘을 기다리면서 즐거운 상상을 했다고. 전부터 쭉 관심이 있었다고. 좋아한다고.

그래, 이런 비슷한 기분을 예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었지. 6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잊지 못하고 꿈에서까지 나타나는 나의 첫 사랑. 그를 떠나보내던 날,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나는 낱낱이 기억하고 있지. 그리고 그가 이젠 만날 수 없다는 말을 했을 때도. 그래도 난 묻지 않았어. 왜 떠나냐고. 내가 싫어졌냐고. 어딜 가느냐고. 그래도 난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 서정윤님께서는 슬프지 않은 뒷 모습은 없다던데. 그 말을 믿어서였을까? 나는 내가 먼저 뒤돌아섰었어.

 

뒷 모습 https://chapo.kr/dansang/3328


왜 감정이 겪해지면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는 걸까? 누가 어떻게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냥 웃으면서 넘겨버릴 수도 있는 건데. 왜 그러지를 못하는 걸까? 그리고 왜 나좋다는 사람은 싫고 나싫다는 사람은 좋아지는 걸까? 사랑이란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늘 말해왔는데. 우리 회사 사람들은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모임에서는 나를 냉정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쉽게 상처받고 혼자서 쇼를 하는 건지. 왜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온갖 일그러진 표정으로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건지. 왜 '봄날은 간다'를 빌려놓고는 달디 단 오레오 쿠키를 먹으며 또 이렇게 주절대는건지. 그래도 세상 어딘가에는 나와 비슷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있기를 바라며.

장면 1주일
장면 울어도 되나요?
장면 다섯번째 뮤지컬
장면 스포츠 중계
장면 대화
장면 신발을 신는 여자
장면 링 핸드폰판
장면 키호테와 (빼앗긴) 자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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