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편
어느덧 병원이다. 그런데도 정원은 한동안 차 안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머니 집에서 병원까지 오는 동안 정원은 내내 하경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수 백 번도 되뇌었지만 그래서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하경에게 못다 한 말을 하겠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당당하게 그렇겠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그런데 문득 너무 오랫동안 차 안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계적으로 안전벨트를 풀고 차문을 열고 다시 닫는 순간에도 정원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병원 건물의 자동문이 열리고, 몸이 가는 대로 엘리베이터를 타러 몸을 돌리던 정원은 그대로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경이다! 짙은 눈화장, 하이얀 피부, 붉은 입술까지 정원의 눈앞에는 영락없는 하경이었다. 보랏빛의 원피스를 입은 하경은 여전히 차디차게 아름답고 당당하다. 너무 차가워서 손끝이 베일 것만 같다. 이게 꿈인가? 마치 날아오르듯이 사뿐히 정원 곁으로 다가온 하경은 다소 냉담한 표정을 짓더니 슬며시 정원을 올려다봤다. 왜 날 그냥 내버려뒀어? 정원은 하경이 자신에게 그렇게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날 하경을 끝까지 붙잡았더라면, 왜 그러는 건지라도 물어봤더라면, 내가 뭘 잘못한 건지 알 수만 있다면. 그런데 그 하경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무력하게 서있는 정원을 원망스레 쳐다보다 냉정하게 떠나버리는 하경
"하경아."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나의 꽃. 정원은 이번에도 하경을 붙잡지 못했다. 그저 눈물을 삼키며 점점 작아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원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시들은 꽃잎처럼 힘없이 떨구는 마리를 안고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가위에 눌린 것처럼 정원은 온몸이 굳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여긴 어디지?
방금 무슨 일이 었었던 거지?
그제야 정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긴 병원 로비이고, 지금 나는 그녀를 안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흐느낀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정원은 갑자기 등 뒤가 서늘해오는 느낌을 받았다. 마리를 보면서 하경이라고 불렀던 좀전의 상황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 너무나 당황스럽고 미안해서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먹먹한 감정이 밀려온다. 그런데 갑자기 경쾌한 벨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인욱과 하원장이다. 위험을 감지한 정원은 본능적으로 마리를 안고 벽 뒤로 숨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들었다.
"스케줄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대화는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실물로 뵈니까 훨씬 더 미남이십니다. 피부도 참 고우시고요."
"곧 시간 잡아 연락드리죠."
"네, 저야 영광입니다."
"또 봅시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둘이 만난다고? 무슨 일로? 정원은 온통 인욱과 하원장의 대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드디어 대화가 멈추자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인욱의 발걸음 소리가 작아져 갔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이제 갔어요."
정원은 조심스럽게 마리의 안색을 살폈다. 창백하다.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마음이 아프다. 차라리 내가 한 말을 못 들었으면 좋았을걸. 왜 자꾸 후회할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보아하니 화장이며 옷이며 아마도 해라 말대로 하경인 척하며 강인욱 사장을 만난 모양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왜 나는 눈치도 못 채고,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놔뒀을까. 정원은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정원이 오늘 하루 힘겨웠을 마리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지만 이런 위로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마리의 숨 죽은 울음소리가 정원의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고 가녀린 어깨를 작게 들썩이는 그녀가 애처롭기만 하다. 이렇게 작고 연약한 여자가 그렇게 힘든 일을 해줬는데, 나는...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정원은 말없이 마리의 눈물이 그치길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자신을 밀어내고는 다소 민망해 하며 걸음을 재촉하는 마리를 살짝 잡으며 정원이 말했다.
"데려다줄게요."
언제나 못 이기는 척 자신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줬던 마리가 배웅해주겠다는 말을 단번에 뿌리치자 정원은 그녀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하얀 도화지에 떨어진 물감처럼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져서 가슴이 아려왔다. 지금 저 상태로 혼자 보낼 수는 없다. 정원은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녀를 가로질러 가서 택시를 잡았다. 다행히 택시는 금세 잡혔다. 뒷문을 여는 순간 마리의 손이 닿았고, 정원은 쭈뼛거리는 마리가 안전하게 탈 때까지 택시 문을 잡고 서있었다. 그리고 서둘러 앞문을 열고 택시 기사에게 택시 요금을 쥐어주며 말했다.
"홍의동이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를 혼자 보내는 게 마음 쓰여서 잠깐 망설였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 정원은 미안한 마음을 한 가득 안은 채 한참 동안 택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마리편
발목에 쇳덩이를 매단 것만 같다. 마리는 병원 건물 1층 로비에서 위태롭게 한 발자국, 두 발자국씩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로 걷는 것인지 대리석 바닥이 자신을 밀어내는 건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몽롱했다.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래, 남편을 만났다. 윤마리가 아닌 갤러리 원장, 우하경인 채로. 하지만 얼굴은 바뀌었어도 나는 여전히 나이고, 그와의 끔찍한 과거는 가슴속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설마 알아차리지는 않았겠지?
극도의 긴장감이 한순간에 풀리자 진이 다 빠져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식은땀이 흘러나온다. 당장 어디에라도 몸을 뉘일 있으면 좋으련만. 마리는 고개를 떨군 채 벽에 기대 숨을 골랐다.
잠시 심호흡을 하던 마리는 없는 기운을 겨우 짜내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눈앞에 정원이 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마리는 갑자기 안도감을 느꼈다. 선생님이 오셨구나. 눈가에 물기를 가득 머금은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고 좀 이상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선은 반가운 마음이 컸다. 오늘 하루 처음으로 미소를 지은 마리는 이제 막 정원에게 말을 건넬 참이었다. 그 순간,
내가 뭘 들은 거지?
정원은 마리의 눈을 보며 하경이라고 불렀다. 그래, 난 선생님 부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 마리는 그제야 꿈속에서 걸어 나와 자신의 처지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여길 벗어나고 싶어.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걸음을 내디뎠지만 결국 힘없이 쓰러지면서 그대로 정원에게 안겼다.
아무도 뭐라고 한 건 아니다. 그런데 흘러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도대체 왜 눈물이 폭풍처럼 흘러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마리는 가슴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끌어 오르는 정체모를 무언가를 느끼며 하염없이 울었다. 정원이 쓰러진 마리를 안고서 망부석처럼 꼼짝 하지 않는 동안에도 마리는 내내 눈물을 떨궜다. 갑자기 북받쳐 오는 서러움을 막을 길이 없다.
그리고 정원이 급히 마리를 안고 벽 뒤로 숨었을 때, 마리는 다시금 어렴풋이 들리는 인욱의 목소리와 함께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참을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걸까. 그리고 자신의 자화상 앞에서 인욱을 처음 본 순간, 갑작스러운 프러포즈를 받으면서 망설이던 일 그리고 떠올리기도 싫은 지옥 같은 결혼생활까지 모든 장면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이어졌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렇게 한참을 운 뒤에 조금은 기운을 차린 마리는 불현듯 지금까지 정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자신을 하경이라고 부르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마리는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 정원의 품에서 떨어진 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가볼게요."
마리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했고,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 있었다.
"아니요, 혼자 갈게요."
마리는 정원을 놔두고 먼저 건물을 빠져나왔다. 날씨는 아직 쌀쌀했고, 몸은 으슬으슬 떨렸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가 기분도 별로여서 어쨌든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그래서 시선이 줄곧 도로에 닿아 있었다. 다행히 거리에는 지나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마침 빈 택시가 금세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정원이 불쑥 나타나 택시를 잡는다. 택시가 멈추자마자 마리는 서둘러 뒷문을 열었다. 그 순간 정원의 손이 닿자 잠시 멈칫하던 마리는 곧 택시에 올라탔다. 그리고 정원이 택시기사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소리가 들었다. 눈도 붓고 화장도 번진 모습을 보여준 게 게 괜스레 신경 쓰여서 마리는 일부러 정원의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렸다.
드라마 슬플 때 사랑한다 http://www.imbc.com/broad/tv/drama/lovein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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