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
왕 뭐라고?
주치의 (망설이면서) 그게…
쩔쩔매는 주치의가 미덥지 않다는 듯이 왕은 그를 매섭게 노려본다.
신하 어서 말씀 드리지 않고 뭐하나?
신하가 재촉하자 그제서야 왕의 눈치를 보며 다시 말을 잇는다.
주치의 요정족들은 혼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신하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것이 마야가 아픈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주치의 (더욱 기죽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시다시피 요정족들은 일정 나이에 이르면 저마다 제 짝을 찾는데, 그 중에는 짝을 찾지 못해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왕은 오래된 고서에서 그와 비슷한 얘기를 읽은 적이 있는 것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문 사례이기 때문에 마야에게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해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신하 무엇이! (왕의 눈치를 보며)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혼자서도 잘 지내왔지 않았는가!
주치의 (당황해서는) 그건 마야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왕이 주의 깊게 듣는 것을 보고는 용기를 내며,
주치의 (조심스럽게) 만약 마야가 이대로 짝을 찾지 못할 경우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왕은 그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주치의를 노려보았다.
마야는 왕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어린 시절, 사고로 동생을 잃은 슬픔에 헤매이다가 우연히 초원에서 발견하여 함께 살게 된 이후로 왕은 마야를 누구보다도 예뻐했다. 선왕은 요정족의 아이를 기르는 것에 대해 탐탁해 하지 않았으나 어린 왕이 그로 인해 웃음을 되찾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물론 왕 역시 비록 요정족과 태양족이 역사 이래로 악연이라고 하나 그것이 어리고 약한 마야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어느 정도 자라자 마야는 왕실의 정원 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선왕의 이른 죽음으로 말미암아 약관의 나이에 왕이 된 외로움을 달래주는 유일한 말벗이 되어 주었다. 그러던 마야가 얼마 전부터 앓기 시작하더니 도무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 왕의 시름이 깊었다.
왕 (갑자기 일어서며) 사냥이다!
신하 폐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왕 저 자가 마야에게 동족이 없으면 죽는다 하지 않느냐. 누구든 잡아와서 마야 곁에 두리라!
신하 폐하, 하지만 요정족과는…
오랜 전쟁 끝에 평화협정이 맺어진 지 100년이 지났다. 선왕의 선왕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조건으로 왕래를 완전히 끊었다. 그 후 마야가 초원에서 발견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두 종족간에는 삶의 터전 자체가 완전히 달라서 사실 부딪힐 일이 거의 없기도 했다.
태양족은 사막 한가운데에 살았다. 끝없는 모래 언덕을 지나면 역시 모래로 지어진 태양의 신전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오아시스가 있었고, 신전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돼 있었다. 그들은 태양을 숭배하였는데,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 성질이 매우 난폭했다. 낮에는 도시에 머물다가 어두워질 무렵이면 초원 지대로 나가 사냥을 했다.
서쪽 초원을 건너면 요정족이 사는 숲이 있었다. 밑에서 바라 보면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는 숲에는 요정족들이 자기네들끼리 오손 도손 살고 있었다. 요정족은 태양족에 비해 몸집이 작았는데, 제 몸집보다 큰 날개로 날아다니면서 주로 꿀을 따먹거나 이슬을 먹고 살았다. 겉 모습만 보아서는 호전적인 태양족과 연약해 보이는 요정족 간에는 다툼이 성립되지 않을 것 같으나 요정족은 제공권을 가진 데다가 매우 끈질기다는 점에서 태양족에게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요정족은 태양족의 근거지인 사막은 물론이거니와 초원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여러 번 요정족에 시비를 걸어온 태양족 때문에 경계심이 강해서 초원 지역까지 염탐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때문에 왕은 초원의 경계를 서는 어린 병사들을 노렸다.
납치
동료 날지 않으면 날개가 퇴화한데.
이카루스 말도 안돼.
동료 아니야. 어른들한테 들었어!
이카루스 그런 게 어딨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날개가 어떻게 없어져.
동료 정말 들었다니까!
초원은 더 없이 조용했다. 오늘로 닷새째 당번을 맡게 된 이카루스와 동료는 무료한 시간을 날개를 안 쓰면 퇴화한다느니 아니라느니 하는 시답지 않은 얘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경계근무는 조를 이뤄서 돌아가면서 했다. 근 100년 동안이나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경계근무를 선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는 없었지만 3교대로 진행되는 경계근무는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이카루스는 벌써부터 지루해져서 어서 빨리 이 기간이 지나고 진짜 군인이 되기를 바랐다. 자신의 꿈이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지 못한 채로.
요정족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왕은 몇몇의 병사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초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어린 요정족이라도 날개는 크고 빛났기 때문에 드문드문 잡초만 무성한 초원에서는 아무래도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이 없는 지 오래되었지만 태양족 역시 초원을 사이에 두고 경계근무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왕은 저쪽에서 잘 안 보이도록 야트막한 언덕 아래에 몸을 숨겼다. 이제 막 교대를 한 참이니 마음을 놓고 있을 자정이 지난 시각에 기습을 할 계획이었다.
요정족들은 태양에 취약했고, 태양족들은 숲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태양족의 장성한 남자들은 몇 개월씩 더 넓은 지역으로 나가 사냥을 하고 전리품을 전부 태양의 신전에 바쳤다. 가끔 초원에서는 요정족과 태양족이 마주치는 일도 있었는데, 사냥을 즐기는 태양족이 사막여우를 사냥하러 요정족이 살고 있는 숲 근처의 초원까지 올 때였다. 하지만 이 때에도 요정족은 태양족을 지켜볼 뿐이었고, 태양족도 요정족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도록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했다. 만약 오늘과 같이 예고도 없이, 그것도 사막여우가 아닌 요정족을 사냥하는 걸 알았다면 요정족이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왕은 요정족 하나 때문에 전쟁까지 일어날 턱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더군다나 얼마 전 태양족 청년이 길 잃은 요정족 아이를 되돌려보내준 일도 있던 터라 문제가 커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요정족과 태양족은 좋은 이웃이 되기에는 너무나 성향이 다르다.
새벽을 한참 달려가는 시각. 이 때가 가장 졸립다. 이카루스는 방금 교대를 하고는 혼자서 멀찌감치 초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초원은 한적하고,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숲과 비교한다면 이렇게 볼품없는 곳도 없으리라. 이카루스는 잡다한 생각을 하다가 자신이 너무 멀리 온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카루스가 뒤를 돌아 동료가 있는 곳을 바라볼 때 갑자기 허공에서 그물이 날라오더니 그대로 뭔가에 눌려 바닥에 얼굴이 파묻혔다. 흙이 섞인 초원의 모래가 이카루스의 입술에 닿았고, 입가에는 피가 흘렀다.
망루
태양의 신전 동쪽 망루 끝에 한 요정족이 묶여 있다. 그의 두 날개는 망루에 단단히 고정돼 있었는데 아찔한 망루 아래로 팔과 다리가 힘 없이 늘어져 있었다. 벌써 몇 시간 째 허공에 온몸을 지탱하느라 어깻죽지는 끊어질 것 같았고, 가끔씩은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는데, 한 번씩 숨을 크게 들이킬 때면 그대로 날개가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병사 복종하겠는가!
이카루스 ……
병사 복종하겠는가!
이카루스 ……
병사 복종하겠는가!
이카루스는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이카루스가 정신을 들 때마다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오기로 버텼던 이카루스는 삼일을 넘기지 못하고 뜨거운 태양 때문에 녹초가 되어 버렸다. 결국 바싹 타버린 입술로 그러겠노라고 말한 다음에야 망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발현
왕 (다급하게) 어떻게 하고 있나?
주치의 그를 돌보고 있습니다.
왕이 자세하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주치의는 왕이 초조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혹은 빠르면 오늘 밤이라도 마야가 발현할 지도 모른다. 발현이란 요정족의 성장 과정에 있어서 특이한 현상으로, 제 짝을 만나기 전까지 중성으로 살다가 짝을 만나면 그제서야 성을 결정하여 여성성 혹은 남성성이 드러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마야는 아직 남성도 여성도 아니었다. 주치의는 왕이 마야가 어떤 성으로 발현했으면 하는지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왕 무엇으로 발현할 듯 싶나?
주치의 그의 성질이 포악한 것으로 봐서는 마야가 발현한다면 여성으로 발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왕 혹 발현하지 않을 수도 있나?
주치의 본능적으로 제 짝이 아니다 싶으면 발현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왕 마야가 발현하지 않으면 그 다음엔…
주치의 비록 당장 발현하지 않더라도 현재는 제 동족이 곁에 있기 때문에 바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왕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기다리라는 말인가?
주치의 빠르면 당장에도 나타날 수 있으나 반응이 아주 느린 경우도 있어서… 더욱이 새로 잡아온 요정족이 아주 불안해 하고 있는 터라...
왕 (신하에게) 마야와 그 놈을 잘 감시해라.
신하 예, 잘 알겠습니다.
왕 만약 마야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신하 염려 놓으십시오. 항시 시야에 가두어두겠습니다.
왕은 새로 잡아온 요정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온실 속의 꽃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야와는 달리 경계병이어서 그런지 어린데도 불구하고 거칠었다. 더군다나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하고, 매달려 있었는데도 간단히 굴복시킬 수 없었다는 점이 영 마음에 걸렸다. 만약 마야가 정말 그와 짝이 된다면? 왕은 몸서리쳐졌다. 마야가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제 동족을 잡아오기는 하였으나 왕에게 있어서 마야는 언제나 자신의 것으로 남기를 바랐다. 그 중에서도 왕이 가장 두려워 한 것은 그로 인해 숨어 있던 요정족으로서의 본능을 깨어날까봐 무서웠다. 선왕은 요정족은 결코 길들일 수 없다고 말했었다.
꿈
그는 밤새도록 아팠다. 처음 그가 근위병들에게 붙잡힌 채 끌려왔을 때 마야는 무척 놀랐다. 왕이 조만간 동족을 데려 오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제 동족은 피부가 하얗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식음 땀을 흘리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제 몸보다 크고 억센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겉보기와는 달리 만져보니 매우 부드러운 흰 털이 손에 잡혔다. 근위병들은 그를 침대에 뉘이고, 발목에 쇠구슬을 채웠다. 그는 가볍게 몸을 떨고 있었으며, 제 몸을 자꾸 날개 속으로 파묻었다.
병사들 태양족이닷!
이카루스 어디? 앗
초원에서 간신히 싹을 틘 어린 풀들을 짓밟고 서있는 태양족의 병사들이 보인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먼지바람. 그 먼지바람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다. 목이 칼칼하다.
이카루스 물… 물…
누군가 목을 축여주는 것 같다.
이카루스 누구….?
살며시 눈을 뜨는 것 같더니 다시 정신을 잃었다. 마야는 밤새도록 이 상태인 이카루스를 돌보고 있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병상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제 동족 때문에 마야의 정신은 온통 이카루스에 팔려 있었다.
감시
왕 요정족 놈은?
주치의 이제 기력을 찾은 듯 싶습니다.
왕, 말 없이 주치의를 쳐다본다.
주치의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마야하고는 조용하게 지내는 것 같습니다.
마야가 일주일째 발현하지 않았다. 이카루스는 마야의 짝이 아닌 걸까. 며칠 동안 마음 고생을 한 걸 생각하면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마야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그 요정족은 벌을 준 게 효과가 있었던지 걱정했던 것보다는 조용한 듯 싶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왕도 마야의 발현을 기다리고 있기는 했다. 마야가 여성이 되면 기쁜 일이었고, 남성이다 하더라도 귀여운 동생으로 평생 같이 살고 싶었다. 왕이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기다리다 못한 신하가 입을 뗐다.
신하 폐하, 곧 다가온 결혼식에 대해서
왕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다음에 얘기하자.
조우
마야 밥 안 먹어?
이카루스 (밥그릇을 내던지며) 먹어서 뭐해!
마야의 극진한 간호 때문인지 이카루스는 이내 기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병사가 안 보는 틈을 타서 내내 막무가내로 행동했다. 그러면 마야는 어쩔 줄 모른 채 병사가 다시 나타낼 새라 바닥에 널 부러진 밥그릇을 부지런히 치웠다. 어릴 때부터 혼자 지낸 마야한테는 제 동족이 반갑기만 한데, 이카루스는 무엇이 불만인지 좀처럼 마야와 친해지려고 하지 않았다.
마야가 지내는 방은 천장이 낮았다. 태양족조차도 정수리에 닿을 정도라서 항상 하늘을 찌를 듯한 숲에서 마음껏 날아다녔던 이카루스에게는 너무나 답답한 공간이었다. 날개를 펴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으며, 더욱 이카루스를 화나게 하는 것은 발목에 묶인 쇠구슬때문에 걷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카루스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쩔쩔 매고 서 있는 마야를 그대로 둔 채 침대에 누워 날개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마야는 숨소리가 날 까봐 조심했다. 이카루스의 눈이 며칠 째 부어 있다. 왕이 자신을 위해 동족을 데려오겠다고 말했지만 첫 날, 이카루스의 날개죽지의 멍과 사막의 뜨거운 태양에 한참 동안 노출된 것처럼 물집이 잡힌 그의 얼굴을 보고 그가 잡혀왔고, 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카루스에게는 미안하지만 마야는 이카루스가 반가웠다. 그리고 언젠가 그의 마음이 누그러지면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마야는 그 때까지 이카루스에게 더 잘 해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면담
이카루스가 잡혀 오고 마야는 일주일 만에 왕을 만났다. 왕은 여전히 따스한 표정으로 마야를 반갑게 맞았다.
왕 잘 지냈어?
마야 네.
왕 걱정했는데,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야.
마야 제가 뭘요. 이젠 안 아플 테니까 걱정 마세요.
왕 오늘 정원에 가봤더니 장미꽃이 폈더구나. 같이 가보자.
마야가 주춤거리자
왕 왜…?
마야 이카루스에 대해서는 안 물어보세요?
왕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왕이 등을 돌리고 있어서 마야는 왕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왕 누구?
마야 (눈치를 보며) 저한테 선물해주신… 요정족이요. 이름이 이카루스래요.
왕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보며) 벌써 통성명은 했나 보구나.
마야 네.
왕의 표정이 잠깐동안 쓸쓸해보였다. 왕은 그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것처럼 낯설어 했다. 눈치가 빠른 마야는 본능적으로 왕이 이카루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알았다. 조심해야지.
마야 (밝은 표정으로) 고맙다구요.
왕 뭐가?
마야 늘 저한테 신경 써주시는 거요.
뜸을 들이다가
왕 그가 어떻게 오게 됐는지 궁금하니?
마야 (무심히) 아니오. 그런 걸 알아서 뭐해요. 그냥 저한테 해주신 것만 기억할래요.
왕 (흐믓해서는) 그래.
마야 (왕의 귓볼에) 고마워요.
왕은 기분이 좋아졌다. 마야는 더 이상 이카루스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고, 다정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언제나처럼 천사와 같은 미소를 지어보여 주었다. 근래 결혼식 관계로 신경 쓸 일이 많았는데, 마야와 함께 있으면 복잡한 정사는 다 잊을 수 있어서 더 없이 좋았다. 이 행복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빈정
이카루스 날지도 못하는 주제에!
이카루스는 자주 마야를 향해 이 말을 내뱉었다. 마야는 자신의 화를 돋구어서 싸움이라도 벌이려는 이카루스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독 이런 잔인한 말로 자신을 괴롭힐 때면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마야 이카루스, 오늘은 기분이 어때? 정원에 꽃이 활짝 폈어.
이카루스 너나 많이 봐. 난 관심 없으니까.
마야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냥 어린애 같은 이카루스가 귀여웠다. 저렇게 틱틱거려도 이 태양의 신전에서 유일하게 같은 종족이다.
마야 아직도 걱정인 거야?
이카루스 뭐가?
마야 (베시시 웃으며) 날개가 없어질까봐.
이카루스 (흘겨보며) 아는 척 하지마!
며칠 째 이카루스는 날지 못하게 될 까봐 걱정했다. 날지 못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 생활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고 있지만 여전히 날지 못한다는 건 이카루스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이대로 영영 날지 못하고, 고향에도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다. 가끔은 천장이 내려앉는 꿈을 꾸었는데, 그 때에는 곁에 있는 마야도 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카루스는 이러한 답답함을 가끔씩 반항하는 것으로 풀었다. 그런 행동이 결코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딱 죽을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어느 덧 사냥철이 다가오자 왕은 그를 사냥터로 데려갔다. 사막여우 사냥은 규율이 엄격한 태양족의 가장 중요한 축제였다.
사냥터
왕 (이카루스를 보며) 사냥을 해본 적이 있나?
이카루스 (차갑게) 요정족은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왕 그래? 그래서 네가 그렇게 도도하구나. 요정족은 꿀과 이슬만 먹고 산다던데, 그런 요정족 군인이 얼마나 잘 뛰는지 두고 보자.
왕이 먼저 소리를 지르자 병사들이 우루루 몰려 나갔다. 그리고 한 병사가 이카루스의 종아리를 향해 몽둥이를 내리쳤다. 이카루스는 갑작스러운 몽둥이질에 놀라 넘어졌다가 일어서서는 다른 병사들처럼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 몸집보다 더 크고 묶인 날개는 달리는 데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사실 요정족은 주로 날기 때문에 뛰는 일이 거의 없다. 군사 수업을 받을 때 뛴 적이 있지만 주로 공중전을 연습한다. 그러니 다른 태양족 병사들과 경쟁이 될 수 없었다. 사막여우를 발견하기에는 아직은 이르다. 겨우 어린 사막 여우를 사냥한 왕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왕 (병사들을 모아놓고) 오늘은 사냥감이 빈약하니 뜀박질을 해서 맨 마지막에 남은 놈이 전리품이 된다. 모두들 전리품이 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뛰도록 하라!
병사들은 ‘와아’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땀에 흠뻑 젖은 이카루스도 병사들 틈에 끼었다. 뜨거운 태양빛에 말라 비틀어진 나무를 반환점 삼아 병사들이 뛰기 시작했다. 무리 지어 뛰는 병사들 때문에 넘어지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카루스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었다. 뛸 때마다 선두그룹에 들지 못했고, 최후의 1인과 뛰게 되었을 때 이카루스는 똑바로 서있을 수조차 없었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뛰었지만 중간에 넘어졌고, 병사들의 환호성 소리를 뒤로 하고 질질 끌려 갔다.
망루에 매달릴 때만 숲을 볼 수 있는 신세가 처량하다. 이카루스는 오늘의 전리품 대신에 망루에 묶였다. 하루 종일 뛰었기 때문에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어깨에서는 통증이 왔고, 힘이 들었다. 왕은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 이카루스를 끌고 나가 괴롭혔다. 마야는 사냥을 하고 난 다음에는 언제나 퉁퉁 부은 다리를 부여잡고 괴로워 하는 이카루스를 돌봤다. 하지만 이카루스를 위해 왕에게 말할 용기는 없었다.
다툼
오늘따라 이카루스의 기분이 더욱 좋지 않다. 마야는 이카루스의 눈치를 보면서 무시하려고 애썼다. 이럴 때 같이 대들어봐야 상황이 더욱 악화될 뿐이다.
이카루스 왕이 널 사랑한다고 생각해?
이 말 만큼은 참기가 힘들다.
이카루스 왕은 널 가지고 노는 거야. 그러다 널 버릴 꺼고. 곧 결혼한다고 하잖아. 그럼, 너만 불쌍해지는 거지. 날지 못하는 요정족 땨위를 누가 좋아하겠냐!
화를 돋우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마야는 뭔가 한 마디 하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이카루스 너 왕이랑 잤어?
이카루스가 무심코 마야를 돌아봤을 때 그가 이 말에 대해 의식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카루스 안 잤다고 해도 머지않아 같이 자자고 할 걸 (빈정대며) 꼴 좋겠네.
마야 그만해!
이카루스 뭘?
마야 왕은 날 사랑하셔.
이카루스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마야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화가 난 마야는 처음이다. 기가 죽지 않으려고 이카루스는 더욱 마야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카루스 아니, 니가 세뇌당한 거야. 왕이 널 사랑하고, 넌 왕을 사랑하는 거라고.
마야 니가 뭘 알아!
이카루스 내가 너랑 산 지 얼만 인데 그걸 모를 것 같애? 넌 우물에 빠져 있어서 네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야!
마야 (상기된 목소리로) 네가 틀렸어.
이카루스 틀렸다고 믿고 싶은 거겠지. 왕한테 물어봐. 나랑 안 잘 거냐구! (마야를 어깨를 잡으며) 물어볼 수나 있어?
마야는 착하다. 이카루스도 잘 알고 있다. 이 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손을 내민 이가 마야였고, 사냥을 다녀온 후, 아픈 몸과 온갖 짜증을 받아준 것도 마야였다. 이카루스도 자신의 말이 잔인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답답함을 풀지 못할 것 같았다.
마야 (울먹이며) 넌 잔인해.
이카루스 아니, 태양족이 더 잔인해. 요정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이야. 태양족처럼 이렇게 납치하고 괴롭히진 않는 다구!
마야 널 봐. 네가 평화를 사랑한다구! 넌 항상 말썽만 일으켜. 왕한테도 버릇없이 구는 건 이 태양의 신전에서 너 밖에 없을꺼야.
그 말은 맞다. 그리고 왕이 아끼는 마야를 이렇게 아프게 하는 것도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건 어쩌면 마야 때문일까.
이카루스 왕은 네가 발현하기를 기다리고 있어. 아마 여자로 발현하길 바라겠지. 어쩌면 남자로 발현해도 널 강제로 끌어안을지도 몰라.
마야 그만해!
마야의 소리가 너무 컸다. 왕은 반 년 만에 마야가 이카루스와 잘 지내는지 보기 위해 막 복도를 돌아오는 참이었다. 미간이 찌푸려진다.
마야 날 그만 괴롭해. 난 여기서 자랐어. 왕이 날 걷어줬어. 어쩌면 여기에서 태어났는지도 몰라. 넌 같은 요정족이지만 내가 너로 인해 발현하진 않았어. 차라리 왕이 요정족이었다면 난 바로 발현했을 꺼야.
이카루스는 요정족의 명예가 더렵혀진 양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이미 미안한 감정 따위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카루스 어디 가서 요정족이라고 하지마. 왕의 발정난 여우같으니라구!
타이밍이 안 좋았다. 이카루스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가장 차가운 눈빛의 왕을 봤다. 방에는 정적이 흘렀고, 마야의 울음소리만 들렸다. 마야는 참지 못하고 문을 뛰쳐 나갔고, 이카루스는 앞이 캄캄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방문이 닫히고 왕의 발자국 소리가 더 이상 안 들릴 때까지 이카루스는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자신이 오늘 도저히 씻을 수 없는 큰 일을 저질렀다는 것 뿐이었다.
왕 (소리지르며) 이카루스가 마야를 괴롭히는 동안 그대들은 도대체 뭘 했나?
왕의 기세에 눌린 병사들은 우물쭈물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왕은 씩씩거렸다. 마야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그를 잡아온 것이 마야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오판이었다. 왕은 당장 이카루스를 벌하고 싶은 마음을 힘껏 누르고 상처 입은 마야에게로 갔다.
정원
이렇게 가슴 아픈 날에도 장미는 여전히 붉다. 몇 년 전 왕이 먼 곳을 다녀와서 어렵게 구해온 장미꽃은 꽃밭을 이룰 만큼 잘 자라줘서 태양의 신전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원을 붉게 물들고 있었다. 문득 장미꽃을 쓰다듬던 마야의 손에 가시가 박혔고, 마야는 그게 또 서럽고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그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도 왕의 사랑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왕이 날 사랑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은 늘 왕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카루스가 말을 하는 동안 불현듯 그의 말이 맞다면 왕을 떠나야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마야는 이카루스보다 자신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것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다.
어느새 살며시 다가온 왕이 수 차례 마야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 마야는 넋 나간 사람처럼 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왕이 마야의 어깨를 잡자
마야 (흠칫하며) 누구?
왕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마야를 바라본다.
왕 마야, 괜찮니?
마야 (더듬거리며) 네, 괜찮아요.
왕 그가
마야 (말을 막으며) 별 거 아니에요. 제가 예민해졌나봐요. 그냥 사소한 말다툼이었어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왕은 가슴이 아팠다. 그 동안 이런 일이 몇 차례나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걸 왜 아무도 몰랐던 걸까. 어디에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
왕 마야
마야 몸이 안 좋아서.
뒤돌아서려다가
마야 오늘은 같이 있어도 될까요?
왕 방에 가고 싶지 않니?
마야 (고개 저으며) 오랜만에 어렸을 때처럼 같이 있고 싶어서요.
어린 마야는 모래바람이 심한 날이면 무섭다고 왕과 함께 있기를 조르곤 했었다.
왕 그래. 몸이 좋아지면……
마야 좀 쉬면 괜찮아질 거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음 날, 왕은 집무실 의자에 앉아 어젯밤의 마야를 떠올렸다. 하루만 같이 있겠다더니 며칠 머무르겠다고 했다. 신하들은 결혼을 앞두고 모양새가 안 좋다고 말들이 많았지만 왕은 그 모두를 무시한 채 마야를 꼭 끌어 안고 잤다.
마야 절 사랑하세요?
왕 그럼. 그런데 그런 걸 왜 물어?
마야가 정말 알고 싶은 건 다른 것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왕은 마야가 한 낮까지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근위병을 불렀다.
왕 (냉정한 표정으로) 내일 새벽 그를 지하감옥에 가둬라. 독방에 갖힌 흉악범들만 골라서 매일매일 전전케 하라. 그가 반항하면 날개를 잘라도 좋다.
감옥
그 날 밤에 마야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카루스는 그 일 때문에 마음에 걸렸다. 하필이면 마야와 언쟁을 하고 있을 때 왕이 나타난거람! 왕이 마야를 무척 아끼는 것을 알기에 당장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틀 동안 퉁퉁 부은 얼굴로 울며 뛰쳐 나간 마야는 돌아오지 않았고, 이카루스의 일상은 변한 게 없었다. 이카루스는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칠지 몰라 불안했다.
마야가 안 들어온 지 3일 째를 맞는 캄캄한 새벽녁에 한참 잠들어 있는 이카루스를 누군가 발로 툭툭 쳤다.
병사 일어나!
이카루스가 정신을 못 차리자 병사는 군화발로 이카루스의 손을 짓뭉갰다.
병사 일어나라구!
이카루스는 병사들의 발길질에 눈을 떴고, 바로 재갈을 물렸다. 병사들이 쇠사슬로 몸을 묶으려 하자 이카루스는 몸부림을 쳤다. 병사 하나가 이카루스의 뺨을 세게 내리 쳤다.
병사 조용히 따라오지 않으면 날개를 잘라버리겠어!
이카루스는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카루스의 발에서 쇠구슬을 떼어내더니 거칠게 일으켜 세워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이 새벽에 망루로 가는 걸까? 또다시 망루에 묶일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해왔다. 더욱 걱정이 되는 것은 이번에는 쉽게 풀려날 것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긴 복도의 끝자락에서 계단 위쪽이 아니라 계단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끝도 없는 계단. 이카루스는 축축한 공기와 흐릿하게 느껴지는 피 냄새를 맡고 자신이 지하감옥에 끌려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요정족의 선조들이 이 지하감옥에서 많이 죽었다고 들었다. 왕의 명령이나 간수의 도움 없이는 단 한 명도 빠져 나온 역사가 없다는 태양의 신전 지하에 위치한 미로 감옥. 꽉 묶인 날개가 뻐근해오고 공포스러운 기분에 바짝 긴장됐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이카루스 (그냥 여긴 조금 긴 동굴인 거야. 우리 집도 이렇잖아!)
요정족은 나무 밑둥에 구멍을 파서 살았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도 조금은 볼 수 있었다. 마침내 병사들이 한 곳에서 멈췄고, 가리개와 재갈, 밧줄을 풀고 쇠구슬을 채우고는 방 안으로 밀어넣었다.
병사 (이죽거리며) 좋은 시간 갖으라구!
이카루스 언제까지요?
이카루스는 철창에 매달렸다. 병사들은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떠들더니 저 멀리로 사라져버렸다. 이곳은 지하감옥 중에서도 악명 높은 독방인 것 같다. 살인이나 강간, 반역자 등 악질적인 죄수들은 지하감옥 중에서도 이 곳에 갖힌다고 들었다. 이카루스는 목이 말랐다.
이카루스 (혼잣말로) 마야
왜 갑자기 마야 생각이 났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문득 누군가 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카루스 (뒤돌아보며) 누구 있어요?
혼자인 줄 알았는데. 저쪽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 이카루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서히 움직이는 물체에 주목했다.
이카루스 (소리치며) 누구냐구요! 앗
그 순간 커다랗고, 더러운 손이 이카루스의 날개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 후 지하감옥에는 이카루스의 비명만이 힘없이 메아리쳤다.
죽음
이카루스가 죽었다. 지하감옥에 갖힌 지 3주가 되어가던 어느 날, 이카루스는 밤새도록 괴롭히던 한 죄수의 얼굴을 할퀴었고, 화가 난 죄수의 손에 목이 졸려 죽었다고 했다.
날개
이맘 때는 달빛이 밝다. 평소에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왕은 작은 소리에 예민해져서는 눈을 번쩍 떴다.
왕 누구냐?
창문을 가득 채운 보름달. 그 달빛 아래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런데 실루엣이 정확하지 않다. 날개?
왕 이카루스?
순간 이카루스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카루스는 이미 죽었다고 들었는데, 누구지? 왕은 좀 더 자세히 그를 보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늘따라 달빛이 유난히 강해서 눈을 제대로 뜨기가 어렵다. 그런데 퍼덕이던 날개를 얌전히 접는 마야가 보인다.
왕 마야? 니가 무슨 일로.
마야는 말없이 미소만 지어보였다. 그 애의 미소는 정말 아름답다. 달빛에 발그레해진 뺨은 더욱 붉게 보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부드러운 곡선의 얼굴 윤곽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마야 이카루스를 죽였나요?
왕 아니.
뭐라고 더 말을 하려고 하는데, 왕의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 밤중에 잠자는 왕을 깨운 이유가 고작 그 놈 때문인 건가? 그와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으면서 지금 와서 왜! 설마...
왕 그는 스스로 죽었어.
왜 이렇게 답했는지는 모른다.
마야 저처럼 혼자 있게 된 요정족이라서요? 요정족은 혼자서는 못살거든요.
왕 난 너와 죽을 때까지 같이 살꺼다.
마야 왜요?
왕 널... 아끼니까.
마야 저도 그래요.
뭔가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왕은 마야가 창가에 너무 가까이 서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가 문득
왕 마야, 발현한 거니? 그가 없는 데도?
마야 모르겠어요. 전 발현한 요정족을 본 적이 없는 걸요.
마야는 다른 요정족과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 요정족이 아닌 태양족의 교육을 받았고, 친구들도 모두 태양족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마야의 발현이 늦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하고는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왕 마야, 날이 추워. 오늘은 나와 함께 잘래?
마야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아니요.
멈칫한다.
마야 폐하께서 저를 사랑하셔도 저는 폐하의 것이 될 수 없어요.
왕은 미간을 찌뿌렸다. 지금까지 마야는 한 번도 왕을 거스르거나 기쁜 나빠할 말을 꺼낸 적이 없다.
마야 요정족은 원래 가두어둘 수가 없거든요.
왕은 처음으로 마야에게 화가 나는 걸 느꼈다. 아마도 마야가 날개를 펼쳐 보이지 않았다면 고함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마야는 자신의 말을 마치자마자 제 몸보다 훨씬 커보이는 날개를 활짝 폈다. 그것은 일찍이 왕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마야는 한 번도 날아 본 적이 없다. 나는 걸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마야가 날고 싶어 할까봐 왕은 마야가 기거하는 방도, 정원도 낮은 천장으로 꾸며 놨었다. 차마 날개를 묶어둘 수는 없었기에 날개를 제대로 펼칠 수 없는 좁은 공간은 그의 본능을 억누르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첨탑의 끝에 자리해 천장이 매우 높은 왕의 방에서는 날개를 끝까지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장관이었다. 한 번도 날아 본 적이 없는 날개는 하얗게 빛이 났고, 깃털 사이사이에서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마야를 중심으로 별들이 반짝이는 것 같다. 그 광경에 넋이 나간 왕은 잠시나마 마야가 날 수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왕 (소리치며) 마야, 위험해!
마야는 날개를 편 채 뒷걸음을 쳤다. 왕은 이 광경을 그 동안 수 십번 꿈 속에서 보았었다.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해질 때마다 꿈 속에서 마야는 이런 식으로 도망쳤다. 이건 악몽이다.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왕 돌아와.
왕이 일어선다. 한 쪽 손을 마야에게로 향했고, 마야가 그 손을 잡아주길 바랐다.
왕 이카루스때문에 화가 난 거라면 미안해. 그가 널 괴롭히는 것 같아서 나도 참을 수가 없었어.
마야가 창문 난간으로 올라서자 다급하게
왕 넌 날지도 못하잖아. 거기서 떨어지면 죽어!
마야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마야 미안해요. 전 죽음 만큼은 제가 선택하겠어요.
이카루스 이건 사는 게 아냐. 개죽음 따윈 싫어. 죽는 것만큼은 내가 선택할 꺼야.
마야의 방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돌덩이를 노려보던 이카루스는 종종 이렇게 말했었다. 마야는 순간 이카루스가 바로 옆에 있음을 느꼈다.
왕 마야!
왕이 마야를 소리쳐 부를 때 마야는 이미 창문에서 뛰어내린 후였다. 왕은 단지 마야의 깃털 끝을 보았을 뿐이다. 왕이 침대에서 정신 없이 창문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에도 사막은 더 없이 조용했으며, 달빛은 여전히 환했다. 그리고 왕이 창문에 다다랐을 때 왕은 마야를 보지 못했다. 그가 날랐는지 아니면 저 어둠 끝에 떨어져 숨을 거뒀는지는 지금 당장 확인할 길이 없다. 왕은 정신을 놓았다. 근위병을 불러 어서 빨리 마야를 찾아야 할 텐데 다리에 힘이 풀린다.
왕 (망연자실해서) 이게 아닌데.